현상들

2024.05.24 - 06.01

About

항해를 시작하며

콜렉티브 섬(Collective SUM)은 문화영, 박정민, 이현화로 구성된 청년 작가 그룹이다. 합(合)을 뜻하는 명사 SUM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서로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를 탐구하고 공동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젝트를 이어나간다. 그룹 활동을 통해 개인의 작업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는 동력을 받아왔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다. 또한 평면, 조형, 텍스트, 미디어 등 여러 매체를 동시에 다루며 장르의 경계를 해체하고 확장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콜렉티브 섬의 출발점《현상들》은 세 작가가 작업을 통해 공통적으로 추적해왔던 생태계(자연, 인간, 문명)를 둘러싼 다양한 현상들에 주목한다. 본 전시는 유연한 연대 관계로서의 콜렉티브의 정체성을, 수면 위로는 파편들처럼 보이지만 해저에서는 연결되어 있는 ‘섬’에 빗대어 나타낸다. 이들은 전체적인 여정을 함께하며 섬이라는 세계를 상상하고 그곳을 관찰, 기록함으로써 삶을 관통하는 여러 현상들을 예술적 언어로 직조해 나간다. 《현상들》은 이현화의 <나선(텍스트 2)> 첫 문장으로부터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현화, <나선(텍스트 2)>, 종이, 디지털 프린트, 29.7 x 42 cm, 2023

본 전시에서 ‘섬’은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인간, 더 나아가 생태계의 반사체로서 작용한다. 이들은 장 그르니에의 『섬』을 참조하여 섬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생태계를 둘러싼 현상들에 대한 사유를 확장해 나갔다. 《현상들》은 독립적 존재인 듯 보이지만 상호작용이 필수불가결한 생명체를, 고립되어 보이나 외부와의 관계성을 배제할 수 없는 섬에 비유한다. 또한 생태계를 관찰하며 발견한 비언어적 형태와 기호를 해석하고 조형언어로 변환하거나 언어의 전통적인 관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등, 세상을 연결 짓는 언어의 대안적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콜렉티브 섬, 공동 프로젝트 <Relay>, 스테레오 사운드, 디지털 드로잉, 단채널 비디오, 텍스트, 2024~

《현상들》에서는 섬을 주제로 진행된 릴레이 형식의 공동 프로젝트 과정이 전시된다. 릴레이는 각자의 해석이 담긴 결과물을 다음 작가에게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문화영이 채집해 재구성한 사운드를 박정민이 이어받아 평면 구성하고, 이를 이현화가 영상, 텍스트화한다. 결과물은 다시 문화영에게 전달되어 동일한 방식으로 릴레이를 한 차례 더 이어나가는데, 일련의 과정은 이들이 그동안 공유했던 섬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운드, 디지털 드로잉, 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제작된 작업들은 독립적 형태로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동의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이루고자 하는 콜렉티브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개인의 섬에서 시작하여 교집합을 통해 공동의 섬을 이뤄나가는 이 과정은, 퇴적물이 축적되어 새로운 형태의 섬을 형성하는 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완결 지점이 불명확한 실험적 협업 과정은 이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문화영

문화영, <죈느와 엘>, 레진, 젤리, 가변 설치, 2023

문화영, <무제>, 목탄, 흙, 금, 37.8 x 47.5 cm, 2024

문화영, <기록 작업 : 가장 완벽하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2016>, 단채널 비디오(16:9),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47초, 2022

세 작가는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개인 작업에서도 섬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녹여보려는 시도를 했다. 문화영은 섬을 기억되지 않는 ‘무(無)’의 차원, 즉 망각으로 여긴다. 그의 작업에서 망각은 단순히 잊혀짐의 의미를 넘어,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순환의 과정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따라서 섬은 망각과 기억이 순환하는, 곧 인간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생태계로서 기능한다. <죈느와 엘>(2023)은 사슴벌레 죈느(암컷)와 엘(수컷)을 관찰하고 그들의 먹이인 곤충 젤리를 표본화한 기록 작업이다. 사슴벌레를 섬의 중심에 있는 객체로 삼고, 곤충의 상태, 날씨 등 자연적 요인에 의해 변화하는 먹이의 형태를 기록함으로써 통제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장면으로 구성된 <기록 작업 : 가장 완벽하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2016>(2022)는 섬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보다 명확하게 그려낸다. 모로코를 여행하며 기록했던 일기장과 수집한 사물들을 화면에 보여주며, 객관적으로 떠올려 보려 해도 잔재만 남아 부유하는 기억들을 소환한다. 또한 현시점에서 재구성한 기록물의 형상을 통해 잔재를 추적하고, 새로운 기억으로 순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망각과 기억의 관계성에 대해 질문한다.

박정민

박정민, <뜰 Seed; type garden>, 디지털 드로잉, 리소프린트, 120×120 cm (개별 크기 20 x 20 cm), 총 18 피스, 2023

박정민, <뜰 Seed; type garden drawing>, 디지털 드로잉, 리소프린트, 29.7 x 21 cm, 2022

박정민은 패턴, 도형 등 여러 기호를 활용한 평면 구성 작업을 통해 개인과 사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시각적으로 탐구한다. 그는 자아의 반사체로서 섬을 상상하고, 생태계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식물의 형태에 주목한다. 또한 흙, 빛, 바람 등 외부의 영향을 흡수하며 섬에서 자라나는 식물을, 외부의 작용에 의해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입한다. 작가는 식물을 매개체로 삼아 기존 언어의 형태를 해체하고, 그 구조적 원리를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식물의 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고,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기능하는 글꼴이 아닌 개인의 서사가 담긴 기호로서의 ‘식물꼴’을 제작한다. ‘자라나다’, ‘흐드러지다’, ‘피어나다’ 등 식물의 형태가 주는 언어적 의미에서 착안하여 식물꼴을 구체화시켰으며, 이것은 곧 섬의 대안적 언어로서의 기호로 읽어볼 수 있다. <뜰 Seed; type garden>(2023)은 총 4개의 시리즈로 전시되며, 기호 제작 과정, 조합 드로잉 그리고 타이핑 영상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기호의 생성 과정을 통해 그 근원을 추측할 수 있게 되고, 작가가 식물을 통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현화

이현화, <나선>, 울사, 핸드 터프팅, 115 x 83 cm, 2024

이현화, <공(空)>, 종이, 실, 가변 크기, 2024

이현화, <나선(텍스트 1)>, 종이, 디지털 프린트, 실 42 x 59 cm, 2023

이현화는 텍스타일과 텍스트의 관계성에서 착안하여 기억, 꿈의 속성과 ‘엮기’의 개념을 연결 짓는 시도를 한다. 작가는 섬을 출입구가 유폐된 개인의 시공간으로 바라보며, 기억과 의식-무의식 사이에서 파편화된 서사를 엮어 섬에 펼쳐 놓는다. <나선>(2023~2024) 시리즈는 핸드터프팅 기법으로 직조한 러그와 실험적 텍스트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이다. 터프팅 작업에는 박정민의 기호가 활용되는데, 《현상들》의 시작점이기도 한 ‘인간이란 개개인의 섬에 사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문장을 나선형으로 배치함으로써 관객에게 암호해독과 같은 경험을 제시한다. 이들이 구축한 섬의 대안적 언어의 활용으로도 볼 수 있으며. 관람객의 개입에 의해 작품의 원형이 변형되는 것은 여러 현상들이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섬의 성질과 교차된다. 작가는 반투명한 막을 씌우고 실로 직조하여 텍스트를 의도적으로 분절시키거나, 작품의 배치를 서로 겹쳐 보이게 하는 등의 실험을 통해 시공간의 중첩을 유도한다.

《현상들》은 공동의 방식으로, 때로는 개인의 시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을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이들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콜렉티브 섬은 본 프로젝트를 항해하며 각자의 섬에서 출발하여 짙은 안개 속을 가르고 군도를 이뤄 나간다. 유연한 연결고리로 맺어져 있는 세 작가의 해석이 한데 모였을 때 발화되는 가능성에 주목하며 《현상들》은 질문을 건넨다. 당신의 섬은 어떤 형상인가. 그 섬에는 어떠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글. 이현화